27 March 2007

첫번째 레서피 공개

부엌에 들어가서 뭘 해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사실 요즘 죽을 맛이다. 때되면 뭘 해먹긴 해먹어야 하는데
이건 재료도 낯설고 공간도 낯서니 원.
나가서 사먹자니 돈도 돈이지만 한 20분은 걸어 나가야
하니 도대체가 귀찮아서 못할 짓이다.

매일 똑같은 걸 먹는 게 안쓰러운지 다들 뭘 준비할 때마다
아는 척들을 한다. 내가 고바야시한테 물어봤다.
여기 있는 애들 말고, 보통의 일본 남자들도 요리를 잘 하냐고.
그렇단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최근에는 아주 공부하면서
요리하는 애들이 많단다. TV에도 요리 프로가 많고,
잡지나 만화책 등 마음만 먹으면 접근할 수 있는 요리
정보가 많아서 요즘 젊은 애들은 다들 요리를 잘 한단다.
너도 그래서 잘 하냐고 했더니 자기는 자기가 먹는 것만
잘한단다. 부엌의 살림 정리를 어찌나 잘하는지. 처음엔
이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인이나 아니면 우렁각시가 그릇들을
정리하는 줄 알았는데 고바야시였다. 다들 먹고 씻어
엎어놓으면 진열장에 싹 정리를 하는 거다. 보온통도 정기적으로
닦고 물이 떨어지면 또 채우고.

오늘 '마시'라는 애는 디저트를 아주 요란하게 만들어서
뭐냐니까 팬케이크란다. 한참 반죽을 해 팬에 붓더니
블루베리까지 얹어 아주 먹음직스럽게 만들어내는 거 아닌가.
넌 날마다 성찬이냐고 했더니, 넌 요리가 싫어, 이렇게 묻는다.
아니, 뭐 꼭 그런건 아니지만....서도. 좋아하진 않지.
어쨌거나 난 오늘도 초간단 요리들로 세끼를 다 해치웠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당장 구해서 만들 수 있는게
없었다.

배고파 바닥을 길 지 몰라 냉동실에 식빵은 항상 챙겨놓고 있다.
과일, 잼, 크림치즈, 야채 조금이랑. 아, 生드레싱( 항상 냉장고에
보관해놔야 한다.)도 있지. 아직 쌀구경은 못했다.
방콕 다녀와서 쌀은 살 생각이다.
편한 맛에 샐러드를 자주 해먹는데 어제 고바야시가 팁을 하나 알려줬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맛있다고.
우선 가지고 있는 재료로 만들었는데 음...맛있었다.
양상추, 토마토, 바나나, 삶은 달걀, 그리고 생양파.
양파를 넣을 생각은 못했는데 얇게 썰어 물에 담가 매운 맛을 쏙 뺀 후
야채위에 얹어 소스를 뿌렸는데 바로 식빵에 끼워 먹어도 될 것 같다.
뭐 참치가 들어가면 참치 샐러드가 될 것 같고. 달걀이 좀 더 들어가면
달걀 샐러드. 이름 붙이기나름의 샐러드가 탄생한다.
얘네들은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요리나 재료에 맞는 그릇들도
참 잘 사용한다. 여기서 어깨너머로 배우면 나도 좀 흉내를 낼 수 있으려나.

시간 날때 마시한테 블루베리 팬케이크 만드는 법을 다시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25 March 2007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여

어제 좀 꾸무럭하더니 기어코 새벽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산을 들기에는 좀 억울한 그런 가랑비가 내린다.
안 쓰면 젖는 줄 모르게 옷이 젖는 그런 비.
아, 요 비가 그치고 나면 이제 정말 내복을 벗어도 될 것 같다.

요시에 친구(까먹었는데 이름을 다시 못 물어봤다.)가
이 게스트하우스에 나 말고 한국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얘기를 했다.
누굴까, 그러고 있었는데 어제 드디어 만났다.
그러나 완전 한국인은 아니고 자아정체성으로 고민 꽤나 했을
그런 친구였다.

처음엔 한국어를 조금밖에 못하는 일본인이라고
소개하더니 한국어를 읽는 것, 말하는 것에 불편함이 없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더니 일본이 물가도 비싸고
일본 생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단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그럼 일본인도 아닌가. 어, 일본어는 완벽한 일본인이었는데...
게다가 한국어 억양이 일본인 억양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하는 한국어 억양 같은데 본인이 일본인이라는데 뭐.
중국 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중국에 있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갑자기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닌가. 진짜 이게 뭐냐고.

머리를 막 굴렸다. 일본인이 일본 생활에 스트레스를 왜 받아?
일본 물가 비싼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남 일에 참견을 안 하는 이곳 문화때문에
한국인들은 좀처럼 일본 생활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데...
역시나 중국인?

그럼 그렇지.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란다.
중국 대련에서 죽 살다가 5년 전에 일본에 왔단다.
직장내 은근히 외국인 차별이 심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사람들 만나면 자기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단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서 아예 얘기를 안한단다.
이상하게 나를 보면서 그냥 얘기를 해도 될 것 같았단다.
내가 왜, 어디가 어때서, 그런 맘이 든 거지?
어쨌거나 실토를 하지 않아도 중국에서 건너 온 사람이란 건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게다가 한국인 피가 섞여 있을 것 같기도 했었다.
억양에서 또 대화 내용에서. 그리고 말하는 스타일에서.
어찌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심지어 아주 개인적인 일까지.
여기서 만난 어떤 일본인도 내가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지
학교를 다니는지 묻지 않았다.

덕분에 여기와서 처음으로 한국말을 실컷 했다.
어딜 나가서도 아직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
이름은 리리고 한국 이름은 원기영.
대화는 일본어로 하잔다. 나야, 어느 나라 말로 해도 아쉬울 게 없지 뭐.
오늘 토익 시험을 보러 가는데 앞으로 영어 공부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뜬금없이 그러는 거 아닌가. 엥?
자기는 이제까지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한 적이 없단다.
여기서 만난 애들 보면 유학파들도 있고, 학교에서 조금씩은
영어를 경험한 아이들 같은 데 자기는 그런 적이 없어서
그 아이들이 부럽댄다. 중국은 학교 교육 과정에 영어가 없나?
어쨌거나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이티브가
아니란 건 알아달라고 그랬다.
한국어 가르치면서 돈 벌려고 했는데 졸지에 영어 선생 일을
먼저 해야 될 것 같다.

그나저나 국제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가 리리처럼 될 것 같은데
참 고민이네. 그냥 세계시민으로 살아라, 그렇게 얘기해줘야 하나?

21 March 2007

도쿄 생활 1주일째

시간 참 금방 간다. 별로 한 것도 없이 말이다.
날씨는 좀 풀린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목에 둘둘 감고 다니는
목도리가 그리 어색하지않다.

그 사이 게스트하우스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고바야시, 요시에, 요시에 친구(이름을 까먹었다.), 카오리, 데이비드.

고바야시는 아주 잘 생긴 일본 남자다. 일본어를 잘한다는 칭찬에
아무 것도 못 물어봤다. 속물 같으니라고...요시에는 큐슈에서
왔는데 친구 셋이랑 함께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산다.
다들 대학교 3학년인데 10월 학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직장을
찾을 거란다. 일본 대학 시스템이란게 3학년까지 공부를 쎄게
하고 4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직장을 찾고, 졸업을 하면
바로 거기 가서 일을 한단다. 도쿄에 있는 애들은 공부하면서
직장을 찾을 수 있지만 지방에 있는 애들은 이렇게 방을 잡아
돈을 써가면서 취직준비를 해야 한단다.

그래도 이런 게스트하우스가 최근에 많이 생겨서 예전에는 이곳에
여행자들이 주로 묵었는데 요즘엔 혼자 생활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묵는단다. 가구가 다 완비되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만난 애들도 거의가 일본인들이다. 나한테는 국적이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요시에와 친구들은 오늘 아사쿠사에 다녀온단다. 언제 시간내서
같이 도쿄 구경을 하잔다. 돈 없으니까 걸어 여행할 계획있으면
그때 포함시켜 달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꼭 그러겠단다.
고향이 온천으로 유명한 벳부 근처인데 동네가 하도 쬐그만해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마을을 한번 바꿔보기로 마음 먹고
최근에 그런 운동을 하고 있단다. 지금 같이 머무는 3명도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고 동네에 가면 한 50명 정도의 멤버가
더 있단다. 칭찬을 마구 해주며 언제 내가 놀러 갈 거니까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그랬다. 내가 일본 마츠리에 아주 지대하게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작년에 젊은 친구들이
동네를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 저 남쪽에
있는 오키나와에 다녀왔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도 곁들여줬다.
아, 그러냐고. 그래서 관심있으면 내가 서로 연결시켜주겠다고
그랬다. 아, 그리고 내가 무려 넉달이 넘게 여관살이를 했던
강원도 산골짜기 '화천'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들려줬다.
꼭 가보고 싶단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이런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뭘까 좀 고민도 할 생각이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사쿠사 다녀오면서 선물 사올 거니까
기대하란다. 음...뭘까나.

카오리는 얼마 전까지 여행사에서 여행 컨설턴트로 일했는데
장래를 생각해서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단다.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을 할 생각인데, 했더니 평생 여행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단다. 그래서 즉석에서 내가 잡 컨설팅을
해줬다. 어찌나 대만족하던지. 일본어 가르치는 데 관심이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 코이카(국제협력단)의 모델인
자이카(국제협력기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국제교류기금에 대해서도. 또 내가 알고 있는
해외사무소가 있는 국제교류기관에 대한
정보도 알려줬다. 당장 찾아 보겠단다.
우리나라도 한국어가르치는 능력 있으면 전세계 다니면서
한국어교사로 살 수 있듯이 일본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
시스템이 더 잘 마련되어 있다. 일본어 가르치는 능력만 있다면.
나만 일방적으로 카오리한테 도움을 준 건 아니다.
다음 주에 갑자기 태국의 방콕에 가게 되었는데
할인항공권을 취급하는 사이트를 소개시켜 주었다.
다른 사이트보다 훨씬 쌌다. 대신에 인터넷으로 직접 구매는
못하고 전화를 해야 한다. http://www.tour.ne.jp/
그리고 방콕 여행에 대한 팁도 많이 얻었다.
이래서 교류가 필요하다니까.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지금까지 만난 유일한 벽안의 친구가
데이비드다. 호주에서 왔는데 생긴 건 북유럽에서 온
사람 분위기다. 키도 거의 2미터에 육박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대뜸, '안녕', '죽을래' 이러는 거 아닌가.
뜻 아냐고 했더니 'do you want to die?' 아니냐며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이다. 한국친구가 친한 사람들한테
쓴다고 가르쳐줬단다. 꽤씸한 한국 친구 같으니라고.

저녁을 대충 챙겨먹고 나오는데 현관으로 작은 트럭
한차 분량의 짐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좀 살던 사람인지
아니면 새로 이사를 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 정보없이 왔나, 싶었다. 이 게스트하우스 구조에
저 정도 짐이면 거의 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에 왔는데 내 방 앞이 아주 부산 스럽다.
나가 봤더니 새로 이사오는 아가씨가 내 옆 방에
살게됐나 보다. 몇년짜리 짐인지 모르겠지만 아, 나도 저러는거
아닌지, 미리미리 조심해야지.

18 March 2007

음식 문화 들여다보기

음식 문화라고 하니까 좀 거창하게 들리는데 먹는 것에도 문화가
반영된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중국에서도 이런 게스트하우스 생활을 거의 1년 정도 했었다.
그때는 노란 머리, 벽안의 친구들이 죄다 중국어를 했지만
여기서 만난 애들은 죄다 일본어를 사용한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부엌에서 만나면 이것저것 만들어 내는데
다들 폼은 유명 요리사 같다. 지지고 볶고 난 후에 가져 오는 건
달랑 한접시의 요리 뿐이지만 과정은 다 그렇다.

중국 남자들은 직업이 요리사 아닌 사람들도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이미 남녀구별이 우리처럼 유별하지 않아 부엌에 들어가는
남자가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 요리를, 그것도 아주 잘하는 중국
남자들을 심심치않게 봤었다. 그때 걔네들의 요리 대부분은
튀기고 볶는 게 다였다. 뭘 해도 기름을 입혀야 요리가 된다.
날씨 탓이겠지만 날로 된 요리를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바다가
가까운 대련에서도 해산물은 날로가 아니라 샤브샤브처럼 뜨거운
물에 한번 담가 먹었던 것 같다. 볶는 요리들은 먹고 남아 이것저것
합해 다시 볶으면 새로운 요리가 탄생한다. 식당에서 음식이
남으면 너나 없이 싸가는데 집에 와서는 한꺼번에 볶아 또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름까지 새로 지어가면서...

여기서 만난 남자애들도 요리가 선수급이다. 특히 어제 만난
두 친구들은 완전 감동이었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생선 손질이
기가 막히다. 오징어 손질도 슥슥, 가리비 손질도 슥슥,
재료가 정리되면 요리도 척척이다. 정리는 두말하면 잔소리고.

음식 잘하는 남자가 좋은데 갈등이다. 이 두나라 사람들 중에
하나를 고르라 하면.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돈주고 사먹으면
되지 뭘 고민하냐고 한다. 그런가?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 '레인보우'라는 한국식당이
하나 있다. 아디스 아바바에 중국 식당은 꽤 되는데 일본 식당은 한 군데도
없고, 레인보우에 가면 몇 가지의 일본 음식을 구경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가면 일본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이곳에 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음식을 시키게 됐다.
이것저것 시키고 있는데 옆자리의 외국인들이 자기들도 도와달랜다.
나름대로 음식을 설명하며 메뉴 선정을 권하는데 뜻밖에 왜
젓가락이 쇠로 만들어졌냐고 묻는 게 아닌가. 자기네들이 중국도,
일본도, 베트남도 가봤는데 젓가락이 다 (대)나무였다는 것이다.
맞은 편에 있는 일본인도 거든다. 자기네들은 쇠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데 너네 건 왜 쇠로 만들어졌고, 게다가 무겁기까지 하냐는 거 아닌가.

음...문득 머리를 굴렸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다른 나라 음식들은
마른 게 대부분인데 봐라, 한국 음식들은 국물이 많지 않으냐.
그런 이유로 우린 숟가락이 발달되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럴 듯하긴 한데 정답은 지금도 모른다. 일본 음식도
중국 음식도 우리 것에 비하면 그리 축축하지 않다. 우린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먹지만 다른 나라들은 후루룩 마셔 버린다. 일본에서는
오카유라고 하는 죽도 젓가락으로 훌훌 넘긴다. 우린 그러고 있으면
복 달아난다고 옆에 있는 어르신한테 머리통을 맞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먹는 것 먹는 도구에 그 나라의 문화가 반영된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17 March 2007

내 방에 정 붙이기

서울에서 보낸 짐들이 도착을 해 걸 건 걸고, 쌓을 건 쌓아
이제 거의 정리가 된 것 같다. 오늘 '無印良品'이라는 가게에 가서
앉은뱅이 책상을 하나 사왔다. 꾸부리고 뭘 하려니 어찌나 등짝이 아프던지.
다 조립이 된 거라 가져와 네 다리만 쫙 펴면 되었다.
공부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난 이상하게 어딜 가면
책상을 하나씩 샀던 것 같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도 내 책상이 있다.
강원도 화천의 용화장에도 하나 있고. 이제 도쿄에서도 하나 장만했다.
침대가 높아 책들은 침대 아래에 쌓아놓았다. 책꽂이는
따로 필요없을 것 같다. 내 방만 침대가 높다는 데 이유는 모르겠다.
마치 해먹에서 자는 기분이다. 물론 해먹보다는 바닥이 평평해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짐정리한 기념으로 그동안 버벅대던 노트북도 완전 대청소를 했다.
그렇게 백업할 시간을 내려해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었는데 금방이었다.
소프트웨어도 버전 높은 걸로 싹 깔았더니
이젠, 이 컴퓨터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건방진 생각이 든다.
노트북 청소 기념으로 오늘 글 하나 남긴다.

방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썰렁했는데 이제 사람 사는 집 같다.
페인트칠 냄새도 거의 사라진 것 같고. 바닥이 카페트가 아니라 장판인데
무늬가 목재같은 느낌이 나서 아주 좋다. 자꾸 좋은 것만 생각하니까
이 공간이 좋아지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이 건물 3층에
내 방이 자리잡고 있고, 화장실이랑 샤워실은 공용으로 사용한다.
부엌도. 집기들은 다 마련이 되어 있어서
재료만 사서 음식을 바로 해 먹을 수 있다. 3층짜리 집에 살면서
1층의 부엌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그리 불편한 것 같지 않다.
처음에 아무대책없이 이 집에서 살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역시 신은 내편인 것 같다.

어제 오오츠키(아무래도 한자를 ' 大月' 요렇게 쓰지 않을까.)라는 친구와
처음으로 인사했다. 스쳐지나가는데 굳이 다시 불러,
나는 오오츠키라고 해, 라고 해서 나도 이름을 알려줬다.
이 건물에 한 50명 정도가 사는데 오늘까지 10명도 다 못 만났다.
오전에 책상을 사러 가려고 집 앞에서 만난 아가씨한테
길을 묻는데 발음이 약간 이상해 중국인이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왕추안페이. 가수 왕페이랑 한자가 똑같다.
가운데 추안은 한국식 한자로 내 '천'을 의미한다.
텐진 출신인데 교환학생으로 와 있단다. 그 학교 시스템은
2년은 지네 학교에서 2년은 다른 나라 학교에서 공부해 학점을 합산한댄다.
장학금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은 불편하지 않은데 학교가 후져
공부할 맘이 없댄다. 이곳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싶은데
내가 다니게 될 학교에 갔으면 좋겠단다.
얼른 공부해서 오라고 교만하게 충고했다.
자기방은 112호인데 내 방은 몇호냐고 대뜸 물어봐서
아무생각없이 알려줬다. 놀러오겠다는 건가? 와봤자 별 거 없는데...

첫날 역에까지 가는 건 성공했는데 돌아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
거의 한시간을 헤매며 이곳의 지리를 다 익힌 덕에 이제 아무 길이나 빠져도
게스트하우스까지 올 수 있다. 참 신기하지.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오던 날은 으슬으슬 추운 날씨였는데 낮엔 완전 봄이다.
담 위로 목련이랑 사쿠라가 활짝 펴 고개를 쳐들고 있다. 학교가 있는
쿠니타치도 그렇고 봄이 되면 일본열도 전체가
미치기 좋을만하게 사쿠라가 지천으로 핀다. 올해도 역시 그렇겠지.
천지사방으로 사쿠라가 만개하기 전에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다.

15 March 2007

도쿄에서 첫 날

도쿄에서 첫날은 정말 테러블한 하루였어요.

무뚝뚝한 아빠가 이번에 짐을 다 싸주셨어요.
한번도 그런 적 없었거든요. 어딜 가도 짐은 제가 쌌죠.
택배로 보내는 짐도 책크기 쫙맞춰서 정말 빈틈없이 싸시더니
가져갈 가방도 크기는 작아보이는데 거기에 무려
33킬로그램을 넣으셨어요. 결국 공항에서 3킬로그램를 덜어내고 부쳤죠.
유학생이라서 10킬로그램 오버한 건 봐준다고 해서요.
그리고 하네다에 도착했어요. 여기까지는 좋았죠.

도쿄의 용화장 주인은 일본 사람이라서 그런지 공항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짐 나오는 시간이 지루해 전화를 했더니
어디어디로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알았다고는 했지만
좀 막막했죠. 원래 메일로는 공항에 나온다고 해서 철썩같이
믿고 짐을 쌌거든요.그래도 어떻게 해요. 30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끌고
마구 헤매며 계약할 사무실에 도착했죠.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도쿄의 지하철에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장애자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처사에 대해서도요. 지하 2층,
지상까지 다시 2층, 이짓을 역마다 몇 번 했더니 결국
가방의 바퀴가 아작이 나서 사무실에 도착했을때는 더이상
끌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버렸어요. 제 몸에 30킬로그램을
질질 끌고 다닌 생각을 하면...어쩜 사람들이 하나도 안 도와주는지요.
아빠가 내려서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셔서,
"조토, 스미마셍...."이럴 거라고 했는데 택도 없더라고요.

사무실 직원은 정말 친절했어요. 어제 하루를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으면서 서비스하겠다고 하더군요. 3월만 계산하는지,
3월, 4월을 다 계산하는지 맘을 못 정해 계약서를 다시 쓰는데도
불평없이 잘 해주더라고요. 돈을 받는 입장이라서 그런거겠지만요.
게스트하우스까지는 그 근처에 집이 있는 여직원이 태워다줬어요.
그래도 다행이죠. 바퀴도 없는 가방을 끌고 갈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했었거든요. 그 여직원은 취직하기 전에 방콕에서 10개월
연수를 했다면서 제 신세를 이해한다고 하더라고요.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리모델링을 해서 깨끗하긴 한데 이상하게 정이 안들더라고요.
주변에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요. 공중전화도 당연히 없고요.
역이 가깝다고 해서 방을 정했는데 이거 역까지 길도 꼬불꼬불,
골목을 한참을 돌아야 하는데 나참원.

커텐을 달고, 이불보를 씌우고 비로소 유학생활이 시작되는구나,
실감이 나더라고요. 방에는 달랑 침대 하나, 미니냉장고
하나뿐이었는데 짐들을 풀어놓으니 어느새 꽉 차버리네요.
노트북 랜케이블이 없어 어제는 인터넷을
못하고 오늘 학교 갔다 오면서 사왔어요. 그 덕분에 지금
인터넷을 쓰고 있어요. 방에서 인터넷이 되는 건 맘에 들어요.

학교에서 수속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아주 복잡하더라고요.
일본에 사는 사람으로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는데 그게 형식적인
게 아니라 만일 제가 수업료 같은 걸 못 내면 그 사람이 내야
한대요. 좀 웃기죠.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에도 관공서에 있는 좀 복잡한 시스템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죄다 일제 잔재더라고요. 인감 만들고, 서류에 한자 많이 들어가고,
하나로 증명되는 데도 여러개 떼야 하고. 그런 'x같은' 시스템의
본산인 곳에 왔으니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어쨌거나 도쿄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14 March 2007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숙제를 다 하고 싶었는데 결국 다 하지 못했다.
원고를 넘기는 일을 겨우 끝냈다.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사이클이 같은 내 친구 얘기를 듣고 내 닉네임이
다큐채널 25가 아니라 다큐채널 24라는 걸
알았다.

우체국에 책 짐은 부치고, 옷가방만 챙겼다.
들어보니 27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다. 이걸 들고
하네다 공항에서 코쿠분지까지 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과 일주일 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왕좌왕했었는데 내일 비행기를 탄다.

'균형', 이것만 잊지 않으면 될 것 같다.

11 March 2007

빈곤의 종말

ODA 국제 컨퍼런스에 Jeffrey Sachs 전 유엔사무총장이
참석하는 걸 알았더라면 가보는 것을.
책이 아닌 그의 육성으로 '빈곤의 종말'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을 텐데...

코이카 쪽으로 연락하면 자료 같은 걸 구할 수 없을까?
어디로 연락해야 하나?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봄이 속삭인다
꽃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교보빌딩 앞에 걸린 글이다. 그 사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이 앞을 지날 때면 늘 한참을 고개들어 쳐다보았었는데...
또 그랬다. 그리고 주먹 불끈 쥐며, 그래 그래야지, 또 그랬다.

날씨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겨울코트는 유효했다.
친구들은 변하지 않았고, 몇년 전에 바쁜 사람은 지금도 바쁘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글이 연재되고 있는 잡지들을 받아왔고, 학교에서 온 서류들을 검토했다.

초콜릿 피부색을 가진 친구와 통화를 했고,
다시 학교와 줄기찬 씨름을 하고 있다.
방을 달라, 제발 내게 방을 달라...

생각지도 않은 가방과 아기 담요처럼 부드러운 소재의
잠옷을 택배로 받았다.

짐을 어떻게 꾸려야할 지, 인터넷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전화를 개통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지,
자전거는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이게 당장 고민이다.

08 March 2007

오랜만의 외출

병실과 집에 쳐박혀 있는 사이 밖에서는 날씨가 널뛰기를 하는 줄도 몰랐다.
봄 같은 겨울에는 안에만 있어 몰랐는데 밖은 겨울 같은 봄날이었다. 3월도
중순에 함박눈이라니. 세탁소에서 찾아 온 겨울 옷을 입으면서 이거 너무
오버 아닌가 싶었는데 스키바지 안 입고 나간 게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둘 말고 다녀 털이 잔뜩 달린 내 겨울 옷차림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청담동엘 나갔다. 그 사이 변한 건 없는 데 길들이 어찌나
헷갈리던지. 시간 맞춰 나갔는데도 헤매다가 15분이나 늦었다.
만남은, 음..., 아주 좋았다. 그 사람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같이 일을
한 적도 없는데 만나면 편해서 수다스러워진다. 이젠 낯간지러운 자랑도
막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참나. 사람 관계라는 게. 콩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게 될 줄 알았는데 작설차를 제일 큰 컵으로 마셨다. 원래도 이 메뉴가
있었는 지 최근에 추가됐는 지는 모르겠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티백차였지만 텁텁하지않고 맑은 게 딱 좋았다. 요즘 내 사는 게 참
막막했는데 속시원히 털어 놓으니 걱정이 마치 다 사라진 느낌이다.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멘토, 이런 거창한 거 가져다 붙이지
않더라도 가끔 만나 이런 기분 드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은행카드 유효기간이 얼마 안남아 이걸 어떻게 늘일까 고민하다
은행에 가서 이거 카드 안돼요, 마그네틱이 손상됐나봐요, 했더니
'즉발카드'가 있다며 잠시 기다리란다. 새 카드는 별로 써먹을 기능 없이
단순한 것으로 바뀌었고, 유효기간은 2012년으로 늘어나 있었다. 야호~~.
카드를 교체하면 한 보름은 기다릴 줄 알았다. 게다가 나같이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한테 새로운 카드를 발급해줄 금융기관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숙제 하나 또 덜었다.

집에 오다 드러누워있던 병원에 잠깐 들렀는데 경과가 아주 좋단다.
오늘은 뭐가 이렇게 다 좋지?

비행기표를 바꿨다. 수요일 밤비행기가 아니라 낮 12시 비행기다.
작가 친구는 취직이 되어서 이날 못 나오게 됐단다. 이렇게 사이클이 맞을
수가. 약속을 미루는 게 미안하던 차였다. 스님 친구한테 연락했더니 그럼
전날 보잔다. 그래서 다 같이 전날에 만나기로 했다. 이것도 좋은 거 맞지?

방을 비워놓으라고 연락했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꼭 비워놓을 테니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럼, 가고 말고. 거기 아님 내가 지금 갈 데가
없거든. 같이 일하자는 데서도 연락이 왔다. 조건을 들어보자고.
그럼 그럼, 가고 말고. 내 코가 석자거든. 이력서를 쓰면서 내가 일본에서
이 짓을 앞으로 몇 번이나 할까 했었는데 뜸안들이고 연락들이
바로바로 와서 어제의 기분을 보상받는 것 같다.

그래, 신은 언제나 내편이었다.

07 March 2007

숙제 하나 끄읕~

고민이라는 게 자꾸 한다고 확실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쯤에서
접어야지, 그러고 있는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본인이 직접와서 수속을 다
해야 한다고. 최악의 경우 학교를 포기한다, 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자마자 이게 아니지, 하고 비행기표 먼저 끊었다. 그리고 눈알이 빠져라
찾던 방 주인에게 비워놔라, 내가 곧 가니, 라는 연락을 해놨다.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나니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오히려 더 개운해
지는 거 아닌가. 문제는 이거였네. 사실 문제가 이거였지. 안 갈지도 몰라,
였었는데 이제 확실히 간다. 14일 오후 7시 40분 비행기를 타고.

내 사랑하는 친구들을 이날 다 만나기로 했다. 짐싸놓고 파주의 헤이리도
가고 수안이 터를 잡게되는 절에도 갈 계획이다. 약산사라고 했던가,
아니다, 낙산사라고 했던가. 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 거기 가면 수안이
있다. 화천에 가면 랍쇼가 있는 것처럼.

방이 쉽게 안구해지고 막막해서 왜 이제는 내 편이 아니냐고 그랬는데,
신은 그냥 언제나 내 편인 것 같다. 방 구하면서 도쿄의 왠만한 지하철
노선을 다 알게됐다.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한번 꽂히면 디리 파는 게
내 '벽'인데 그 덕에 이제 두리번거리지않고 도쿄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일본에 가면 공부만 해야지 했었는데 그건 또 안될 것 같다. 그래서
몇 군데 메일을 날렸더니 일본에 오면 바로 연락을 하라고 한다. 학기 시작
전에 일을 시작할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내가 누구한테 나를 의지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아주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그냥 나를 믿고 살 팔자다.

내가 나를 친구삼아 그렇게 잘 살련다.

06 March 2007

정다산 선생 가라사대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당했을 때 무엇보다 제일 걱정했던 게
두 아들의 교육문제였다. (천연두로 아이들을 잃은 후 아마 아들 둘에
딸을 겨우 건졌던 걸로 안다.)

지금 다 기억은 못하는데 서울을 떠나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다. 저 살기
싫다고 처자식 다 데리고 산에 숨는 사람들을 아주 몹쓸 사람으로 매도했다.
저만 망하지 자식까지 망하는 일이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화의 중심은
서울이었었나 보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꼭 서울에 붙어 있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닭을 한번 키워보겠다는 아들에게 이왕 키우는 것 제대로 키워보고
키우는 것으로 그치면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으니 그걸 잘 기록해서 책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담배 이야기인 '연경'
처럼 너는 '계경'을 한번 만들어봐라, 이랬었다. 그리고는 책의 목차까지
잡아주고 참고하라며 참고문헌까지 적어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또 패족이라도 돈을 벌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돈벌이가 힘들어도 돈놀이
같은 건 하지말고 힘 안들이고 돈버는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의원을 하는 아들에게 그렇게 쉽게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대신에 누에를 기르고 과실수를 심으라고 했다.
고지식한 분 같으니라고.

따뜻함이 없으면 공부해서 뭐하냐고 했고 경제적인 기반도 없이 저
살 궁리만 하는 공부도 필요없다고 했다. 나아가 상아탑 속에서 공부만을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경멸했다.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없는 공부를
해서 뭐하냐며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분이셨다. 아버지가 이런데 자식들이
바르게 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18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할 거라 다들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강진 유배 생활이 끝났을 때 그는 500여 권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의 책들을 들고 짜잔~나타났다.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지금의 내 상식으로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책들은
제목만 봤지만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산 선생 성격에 책들을
허투로 만들 사람도 아니고. 참으로 놀랍다.

나도 이제 한 6,7년 쳐박혀 있을 계획인데 먹과 붓으로 18년에 500여권이면,
난 그럼 200권은 족히 만들 수 있는 시간에 무슨 일을 하며 날들을 보낼까.

이래저래 요즘 심난하긴 한데 이상하게 이럴 때 다산 선생 생각이 많이 난다.

05 March 2007

요즘 내 고민

기념으로 뭘 하나 남겨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건 없고,
요즘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는 데 이걸 어떻게 타개해 나가는 지
내가 나한테 궁금해서 적어 볼게요.

하는 일이 재미없어서는 아니고 이쯤해서 한번 더 공부를
해 줘야 할 것 같아 시험을 쳤는데 덜컥, 붙어버렸어요.
원래도 별로 대책이 없는 사람인데 시험에 합격하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학교를 다녀야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일단 붙을지도 잘 몰랐고. 그런데 붙었으니 포기하기는 아깝고
학교를 가긴 해야 하는데 사실 좀 막막합니다.

고등학교 금방 마치고 처음으로 대학생활 하는 풋풋한 20대도
아니고 나이도 남부럽지않게 먹었는데 어디다 손벌릴 뻔뻔함은
없고 지금 내가 가진 재주를 다 부려 한달이 채 안남은 기간
그런 고민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참 나...
그래도 이렇게 풀어내니까 머릿속은 좀 정리가 되는 것 같네요.

*우선 학교에 들어가는 돈
-입학금 282,000엔
-수업료 267,900엔(1년 535,800엔)

*살 집에 들어가는 돈
-오늘 계약하면 들어갈 수 있었던 방 3,476,700원(3개월)

이제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 근처에는 아예 방이 없다네요.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학교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아무튼 재주를 부려야겠죠. 잘 되어야 할텐데...

블로그를 드디어 시작합니다.

여러가지로 제 매니저인 어랍쇼라는 친구가 이걸 꼭 만들라고 해서
오늘 만들었는데 아주 복잡하네요. 여기에 와서 자주 글을 올릴 수
있을 지 자신이 없는데 일단 숙제는 하나 한 것 같습니다.

휴~~